광고
광고

'신라의 미소' 수막새 진위여부 논란

서성철 관장 “신라시대 유물 아닌 60년대 고궁다방 기둥 벽에 있던 문양을 파낸 것”

김영호 기자 | 기사입력 2017/03/27 [16:28]

'신라의 미소' 수막새 진위여부 논란

서성철 관장 “신라시대 유물 아닌 60년대 고궁다방 기둥 벽에 있던 문양을 파낸 것”

김영호 기자 | 입력 : 2017/03/27 [16:28]
▲     © 드림저널


[드림저널 = 김영호 기자] 와당이란 점토를 일정한 형태로 틀에서 뜬 다음 구워서 지붕을 덮는 데 사용하는 건축자재로 중국·한국·일본의 고대 건축물은 목조에 지붕을 기와로 덮었는데,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로 구성된다. 수막새는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것이므로 보통의 평기와, 즉 암키와·수키와에 비해서는 그 수량이 현저히 적게 제작됐다. 수막새의 사용은 중국의 전국시대에 제작되었던 반원(半圓) 수막새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구려 지역에서도 이러한 반원수막새가 출토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는 이미 기와집이 다수 세워져 있었으며 와당이 붙은 막새기와도 사용했었다. 얼굴무늬 수막새(人面文圓瓦當), 일명‘신라의 미소’가 모조품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국립경주박문관에서는 이에 대해 일고의 가치가 없다며 진위여부를 거부하고 있어 의혹만 더해 가고 있다. 이에 본지는 경주의 역사적 문화를 가치를 고찰하고 잘못된 부분에 대한 문화적 진실을 밝히고자 관련기관 등에 다각도로 조명해 본다.


현재 이 수막새 와당은 경주의 브랜드로 각종 조형물, 기념품, 안내판 배경사진, 경주엑스포의 마크 등 각종 문화행사의 포스터로 사용되고 있다. 얼마 전 막을 내린‘2017 실크로드 코리아-이란 문화축제’에서도 이 모양이 사용됐지만 이미 이 수막새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다시 경주시가 논란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이다. 2014년 경주문화원에서 발행된‘경주문화’제 20호 특집호 책자에도 각종 의혹 때문에 진위여부가 필요하다는 12쪽 분량의 논문 형식이 게재되기도 했지만, 이란에서‘얼굴무늬 수막새’를 포스터 등으로 다시 사용했다. 이 수막새는 1998년 제1회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새천년의 미소’란 주제로 개최되면서 본격적으로 경주의‘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신라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공식적인 연대 측정이 없었으며 기록이나 국립경주박물관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아 그 신빙성을 잃고 있다.


서청철 관장, “고궁다방의 장식품에 불과”
경주 양지고미술관 서성철 관장에 따르면 1960년대‘광신당’이란 골동품가게에서 진열된 와당 일부를 경주시 동부동에 위치한 고궁다방 측에서 구입해 실내 기둥 장식품으로 사용했으며, 이후 붙어 있던 얼굴무늬수막새를 징을 이용해 파내면서 일부 손상이 갔다. 서성철 관장은 이 때문에 수차례 정부에 확인을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회신을 받지 못하고 있은 실정이다. 또 당시, 징으로 끌어내는 작업을 직접 본 증인도 있다며 같은 모양 5점 정도를 파낸 것으로 기억했다. 결국 다방에서 장식품에 불과하던 이 수막새가 경주의 최고 브랜드가 되면서 역사적인 모순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이 수막새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문관 측은 이 같은 수많은 의문점에도 박일훈 경주박물관 관장이 직접 일본인 다나카씨로부터 기증받아 신라시대 유물로 등록됐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알려졌다. 때문에 국가에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주문화’책자 보고도 관련기관 묵묵부답
경주문화원에서 발간된 책자‘경주문화’20호가 발간된 당시 이에 관여한 고복우 사무국장도“(모조품 이라고) 의심한 적이 없다”며 말했다. 당시 책자 발간으로 그 의혹 등을 실은 내용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보긴 봤지만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말해, 실무 책임자로서의 뜻밖에 답변을 들어야 했다. 이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이 같은 논란에 대해 답변을 요구했지만 20일 현재 회신은 오지 않았다. 홍보담당자가 이 내용을 실무자에게 전해주기로 했으나 답변은 없었다. 이 책자에 따르면 얼굴무늬 수막새는 1934년 경주의 한 고물상에 있던 것을 경주에 살고 있던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라씨가 구입했으며 이를 박일훈 경주박물관 관장이 신라시대 중요한 유물임을 판단, 친분이 있던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장 오사카 긴타로씨를 일본에 건너가 만나 다나카씨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해 1972년 10월 14일 국립경주박문관으로 가져와 소장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막새 전달자, 기증 시기 엇갈려
다나카씨가 일본으로 돌아간 시기를 1940년이라고 했지만 경주박물관은 1944년이라고 밝혀 연도를 엇갈리고 있다. 또 수막새의 기증날짜도 경주박물관은 1974년 10월 14일 기증식을 가졌다고 밝혔지만, 박일훈 관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2년 9월 14일 수증식을 했다.‘경주풍물지리지’에는 인면와당의 전달자는 일본의 나카무라씨고 1972년 10월 17일자로 적시됐다. 또 어떠한 과학적인 연대측정이나 진위여부 확인을 위한 부분들이 없는 상태이다. 반면 서성철 관장의 주장은 구체적이며, 시, 도, 정부기관, 총리,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8차례나 민원을 제기했다. 이 수막새를 꺼낼 작업을 할 때 옆에서 지켜보던 증인의 육성 녹음도 공개했다. 또 민원 내용에는 만약 자신의 주장이 거짓일 경우 모든 민형사상 책임과 일본 국보 이도다완에 버금가는 소장분 유물 등 재산 일부를 내 놓겠다는 위험성도 감수했다.


출토된 기록 전혀 없어,‘황륜사에서 영묘사로’
국립경주박물관은 지금의 사정동 흥륜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절터에서‘대영묘사’‘영묘지사’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와 등이 발견되면서‘영묘사’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를 전시하는 곳에도 6~7세기‘전 경주 영묘사터’로 수정했다. 또 이 수막새가 어느 학자이던지 신라시대 것이라고 나서지 않고 있으며, 처음 공개 당시와 전시된 수막새의 색깔이 많이 달라졌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와당 전문가는 “신라시대 영묘사에서 발견된 수막새 등을 살펴보면 모두 목재 틀에서 찍어낸 것인데, 얼굴무늬 수막새는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가 끌 등으로 다시 세밀하게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며 견해를 밝혔다. 서 관장은“얼굴무늬 수막새가 암기와 와당에 있었다면 1점만 발견될 수없다”며 날조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주문화’20호 책자에 따르면 다나카씨가 일본으로 돌아간 시기도 경주박물관은 1944년으로, 박일훈 관장의 회고록에는 1940년으로 (사)경주관광진흥원은 해방 후라고 전하고 있다.


정부, 경북도, 경주시 진위 파악 노력 필요
지자체의 대표적인 브랜드는 꼭 필요하고 홍보의 중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모조품이나 위작일 수 있다는 주장이 끊이질 않는 가운데 지금의 연대 측정 기법으로 확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경주시가 대표적인 브랜드로 사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찾기 힘들다는 것이 모조품이라는 주장 측의 일관된 입장이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자칫 역사적인 왜곡으로 밝혀질 경우 그 파문을 감당하기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 진위여부를 가리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무엇이 경주시를 위하는 것인지, 특히 관련 공무원이 논문형식에도 참여한 것으로 안다”며“그런데 왜 의혹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서 관장도 “경주시, 나아가 경북도, 그리고 정부기관의 노력으로 명확한 답을 얻어야 한다”며“역사 앞에서 왜곡된 부분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이를 바로잡는 노력이야 말로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도리다”고 했다.

광고
광고